- 여행일자 : 11년 4월 27~29일(수,목,금)
- 장소 : 베트남 일원
- 누구와 : 20년 장기근속 회사 동료분들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어제밤에 대우호텔에서 자고 난후에 아침에 일어나니 이곳 하노이 시내의 아침은 우리나라에서는
볼수없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차량과 뒤섞여 질주하는 모습에 우리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마음이 여간 어리럽기만 하다
하여튼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의 날씨는 잔뜩 짙뿌려있고
또한 습도가 매우 높은것 같다
이곳 베트남은 해안선을 끼고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나라인데
현재 우리가 있는 하노이는 윗쪽의 베트남 지역이다
그래서 이곳 북부 베트남은 기후가 아열대 지방이라고 하며
남부의 호치민이 있는 곳보다 그리 온도가 높지 않다고 한다
그래도 더운 여름에는 40도가 넘은 날이 많다고 하지만 지금은
한여름이 아니라 평균기온디 25~6도 정도 된것 같다
아열대 기후라고 해도 역시 더운것은 사실이며 습도가 매우 높아서
잘 적응이 안된다
암튼 오늘 여행은 첫날인데 조금 빡빡한 일정이라고 한다
차량도 많이 이용하면서 말이다
오늘 일정은
하노이 시내의 바딘광장과 호치민생가 그리고 호치민 박물관을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약 2시간을 달려 화빈이라는 도시에서
민속공연을 보고 난후에 소수민족 생활체험을 하는 일정이다
그리고 화빈 인근의 수력발전소에 들러 화장실에 들른후
하노이 시내로 돌아와서 발맛사지를 받고 피로를 푼후에
저녁을 먹고 내일 여행지인 하롱베이로 향하는 일정이다
암튼 베트남은 휴게소도 별로 없고 또한 화장실을 가려면
돈을 내야 되기 때문에 화장실이 무료인 수력발전소에서 볼일을
보러 들른 것이다
하노이시내에서 하롱베이까지는 동쪽으로 버스로 약 4시간을 달려야 되는데
도로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노이에서 하롱베이까지는 약 200키로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고속도로가 발달한 우리나라 같으면 2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거리를
이곳에서는 4시간을 달려야 된다
전시된 미국차량의 모습
유일하게 미국차 중에서 베트남에서 실패한 차량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의 역사는 아픔과 기쁨의 반복이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투쟁,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노력,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까지….말 그대로 전쟁과 독립의 역사를 반복해온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선사시대) 기원전 3세기에 청동기 시대의 세련된 동선문화가 출현했다. 베트남의 원류를 중국 전국시대의 월나라 유민으로 보기도 하지만 동선 문화를 향유하던 락비엤 족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중국의 지배) 그후 938년까지 기나긴 중국 지배가 이어진다. 603년에는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칭하며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도 했었다. 그나마 중남부 지역은 중국의 영향이 닿지 않아 2세기경부터 참파 왕조(참족으로 현재는 소수민족으로 일부만 남아있음)가 형성되었다. 한자, 유교, 불교는 이 시기에 전래되었다.
(독립왕조시대) 이끈 후 응Ngo왕조를 수립하며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최초로 독립하게 된다. 뒤를 이어 965년에 딘Dinh 왕조가 성립됐으나 주군을 중국에 양도하고 속국임을 자처하였다. 딘 왕조 이후 등장한 레Le왕조 역시 오래 통치하지는 못했다. 행정제도와 조세재도를 정비했다. 수도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으로 옮겨 중앙 집권 통제를 시작했다. 이후 국호를 다이비엣 Dai Viet(大越)으로 변경하고 주변의 송나라, 크메르, 참족과 견주며 독립국가를 유지해 나간다. 쩐(Tran)왕조(1225~1400)때에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을 물리쳤다.
(레 왕조) 등장한 것이 레왕조(1427~1789년), 레 러이와 응웬 짜이는 10년이 넘도록 지속됐던 명나라와의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둔전제 실시, 법률정비, 국자감 설치등의 군사제도와 유교제도를 재정비했다. 남부의 참파왕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조, 발굴해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 했다.
(응웬 왕조) 중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각각 외부 세력과 힘을 합쳐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는데 찐가는 덴마크와 , 응웬가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다. 이런 혼란기에 농민들의 반란(떠이선 반란)이 일어나 기존 세력을 몰아내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제압, 1801년에 남북부 지역을 완전히 통폐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쟈롱황제로 칭하고 수도를 훼(Hue:중부지역)로 천도해 응웬 왕조(1802~1883년)를 성립한다.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나라인 비엣남 (Viet Nam 越南)을 국호로 정식 승인 받고 남부까지 통합한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를 열었다.
유교를 더욱 강화하고 중화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외국인에게 이양된 상업권을 회수하고 외국인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박해는 티에우 찌 황제때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는 일로 발전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는 1874년에 군대를 보내 다낭을 비롯한 베트남 중남부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부 지역에 식민지인 “코친차이나”만들었으며 1883년에는 중부지역을 안남, 북부 지역을 통킹이라고 부르며 보호령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식민지배) 식민지배 기간에 쌀과 고무등을 수탈했으며 철도 등의 제반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중국으로 부터의 천년가까운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은 프랑스 지배기간에도 완강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해외파들이 주도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사회주의 성향을 띤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옌바이 봉기를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된 것은 1930년으로 이때, 베트남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인 호치민이 등장. 1941년 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한다.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을 받아 인도차이나에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호치민은 공산당 세력을 규합하여 베트남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설립한다. 그러나 베트남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라오스 캄보디아등 주면국 모두 공산주의화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호치민의 독립선언은 인정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포츠담 회담을 통해 베트남 북부는 중국, 남부는 영국군이 분할 통치할 것을 합의 하였다.
(남북 분단과 독립전쟁) 남부는 영국군이 들어섰다. 또한 이런 틈을 노려 프랑스도 종주권 회복에 노력하였다. 때마침 호치민은 북부에 진군한 중국군(국민당)을 우려해 프랑스에 북부 주둔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1946년 11월, 하이퐁에서의 관세분쟁으로 인해 프랑스군이 공격을 가해옴으로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그 와중에 중국이 공산화되는 커다란 지형 변화를 겪에 된다. 중국의 모택동은 호치민을 지원하였고. 열세에 놓인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다. 아시아 국가의 공산화(도미노 이론)을 우려하던 미국은 프랑스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 결과 독립전쟁은 이념 전쟁으로 변질된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디엔 비엔 푸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패당하고 같은해 7월 20일 제네바 협정을 조인하며 끝을 맺는다. 제네바 협정은 2년후 자유 총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할 통치되는 계기가 된다. 북쪽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정권,
(베트남 전쟁과 통일) 지엠 정권의 연장을 승인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개적인 숙청 작업이 시작됐다. 남부에 있던 이런 혼란을 틈타 호치민은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시도한다.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은 미군의 대규모 전투전과 기습 공격 및 지뢰 사용을 주무기로 하는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전은 전선도 없는, 잔인하고도 지루한 소모전으로 수년간 계속됐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68년 베트남의 설날에 게릴라들은 남부 베트남의 100여개 도시를 총공격해 사이공주재 미국 대사관마저 점령했는데, 이 장면이 TV에 보도되면서 미국 내에서 격렬한 반전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책임을 지고 그해 실시될 대통령 선게에 재출마를 포기했다. 차기 대통령 닉슨은 “ 미군 없이 남부 베트남 군인들에 의해 전쟁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발표하고, 이는 곧 “닉슨 독트린”으로 이어진다. 이후 베트남전의 기세는 점점 수그러들었고 닉슨 대통령도 2만 5천명의 미군 철수를 발표하면서 북부 베트남과 평화회담을 전개했다.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밀 폭격으로 인해 100만명 가까운 캄보디아인이 사망하자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반전 데모가 일어난다. 여기에 베트남전의 전모가 담긴 미 국방성 비밀문서 유출사건이 터지면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파리회담은 1973년 1월 휴전협정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해 베트남의 모든 미군이 철수하게 됐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이 함락되면서 기나긴 베트남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자료 발췌함) |
이곳 호치민박물관은 호치민이 독립을 하기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할 당시의 모습을 전시한 곳인데 그때의 상황을
잘 표현해 놓은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하면 미국과 했던 월남전을 생각하지만
월남전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와 오랜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그리고 베트남 남자들은 거의 모두다 여성들에 비해서 생활력이 떨어져
집안일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고 거의 대부분 여성들이 집안의 생활을
도맡다시피 한 이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베트남 남자들은 전쟁을 치르다보니 전쟁터에 있느라 집에서 생활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거의 대부분 여자들이 집에서 생활하다보니
여성들이 생활력이 더 강하다고 한다
그리고 베트남은 평지도 많지만 평균 2천여미터가 되는 산악지형이 많다고 한다
프랑스 군대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베트남 군인들이 산악지형으로 약 6개월동안
강행군하여 원시적인 무기로 무방비 상태의 프랑스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호치민박물관도 프랑스와 전쟁시에 사용했던 원시적인
무기들이 전시되고 있다
나중에 월남전도 결국은 미국이 포기를 하고 물러섰지만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도
독립운동을 계속 하면서 전쟁을 했지만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암튼 이곳 호치민박물관을 가이드분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을 했지만
시간이 없어 차분하게 관람을 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본후에 박물관을 나선다
호치민박물관을 나와서 마눌과 함께
호치민박물관 관람을 한후에 오늘 함께한 분들과 단체사진을 담아본다
다시한번 더
박물관에서 바라본 입구의 모습
박물관을 나오면서 뒤돌아본 호치민박물관의 모습
호치민박물관을 나오면 조금전에 들어갔던곳 옆으로해서 나오게 되며
바딘광장을 다시 바라본다
지금도 수많은 분들이 호치민주석의 시신을 보기위해 줄을 고 있는 모습이다
암튼 호치민 주석은 베트남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데
그래서 이곳 호치민 주석의 시신을 보기위해서는 복장도 단정해야 된다
슬리퍼도 안되고 짧은 반바지도 안되고 말이다
호치민 주석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을 당겨본 모습
저곳은 카메라를 갖고 갈수가 없는 곳이다
베트남 국민들이 시골에서도 많이 와서 호치민 주석의 시신을 보기위해 줄을서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유치원생들을 비롯하여 학생들까지도 너무나 많이 온다
버스를 타기전에 바딘광장의 끝으로 가서 바딘광장을 담아본다
이곳 바딘광장에서 호치민 주석이 베트남 국민들과 함께
1945년도 9월 2일에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한 곳이라고 한다
물론 미국에 의해서 독립이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베트남 국민들은
독립선언을 했던 곳이라고 하여 매우 중요시 여긴다
베트남의 정식적인 독립기념일은 월남전이 끝난후인
1975년 4월 30일인데 우리가 다시 하노이 시내로 온날이 29일 이었는데
그때의 하노이 시내는 독립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최대의 축제일이라고 그런다
물론 관공서및 박물관등 거의 대부분이 이날은 쉰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곳 바딘광장은 호치민 주석등이 최초로 독립을 선언했던 1945년을
더 기념하고 뜻깊은 날로 기억한다고 그런다
바딘광장 끝에서 당겨본 모습
여기저기에서 군인들이 근무를 서고 있으며 건물 윗쪽에 호치민 이라는 글이 씌여있다
버스에 탑승하기전에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몰라 다시한번 담아본다
하노이 시내에서 화빈으로 이동중에 바라본 하노이 시내의 모습
하노이 시내에서 첫 여행지를 둘러보고 이제 두번째 여행지인 화빈으로 향한다
화빈은 하노이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2시간 정도 가야 되는데
처음 1시간은 도로 상태가 좋았다(6차선)
그러나 다음 1시간은 2차선 도로였는데 도로 상태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도로 주변에 사람도 많고 또한 오토바이도 이리저리 다니고
베트남 일소인 버팔로도 도로를 횡단하고
암튼 정신이 없다
버스 운전기사는 베트남 분이었는데 계속해서 약하게 빵빵거리면서 화빈으로 향한다
참고로 베트남 수도는 하노이인데 하노이 인구가 약 430명 정도라고 하며
오토바이는 약 400만대하고 하니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는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차값과 기름값이 비싸서 자동차를 사기가 힘들어
비교적 저렴한 오토바이를 선호하는데 그렇다고 오토바이도 싸지는
않다
우리 가격으로 약 200~250만원 정도라고 하니 우리나라보다 비싼 편이다
소득에 비해서 물가가 너무 비싼 편인데 휘발유 1리터 가격이 산유국인데도
불구하고 약 1000원 정도라고 한다
하노이 시내를 거의 벗어날 즈음에 제법 멋지고 규모가 큰 건물이 보인다
그래서 무슨 건물인지 물어보았더니 몇년전에 저곳에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정상회의를
했던 곳이라고 한다
무슨 정상회의를 했는지 얘기를 들었지만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암튼 저곳 주변은 하노이 시내에서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곳이라고 그런다
정상회담을 했던 곳을 바라보며
베트남의 전형적인 집의 형태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 2차선 도로를 달리면서 밖을 바라보니 신기해서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논가운데에 낮은 이상한 건물들이 보여서 물어보니 공동묘지라고 그러고
암튼 궁긍한 사항을 가이드분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저곳 건물은 베트남의 건물인데 베트남이 독립후에 필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도로주변을 선호하다보니 여러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기위해 도로주변은 좁게하고
뒤쪽으로는 거의 제한을 두지 않아서 저런 형태의 집이 거의 대부분 이라고 한다
도로와 접하고 있는 앞쪽은 약 3~4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반대로 뒷쪽으로는
상당히 길다
그리고 돈이 없이 때문에 앞쪽은 그런대로 번지르 하지만 옆과 뒷쪽은 페인트로
바르지않고 그대로 산다고 한다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 약 1시간 정도 달리니 창밖에 내가 좋아하는 산들이 많이 보인다
평지만 보다가 이곳에 오니 멋진 산들이 보이는데
가이드 분에게 물어보니 석회암으로 형성된 산이라고 그런다
물론 내일 가게되는 하롱베이와 비슷한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베트남은 석회암 지질이라 물맛이 우리나라와는 좀 다르다
날씨가 잔뜩 흐려있지만 밖의 산을 바라보니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갈수가 없는 형편이라 열심히 바라만 본다
그리고 이곳 베트남은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고 그런다
북부지역은 2기작으로 하고
호치민이 있는 남부지역은 3기작을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2모작이라고 하는데 모작이라는 말은 한가지 종류가 아니어서
즉,일년에 벼농사,보리농사 2가지를 한다고 해서 2모작이라고 하지만
이곳 베트남은 계속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2기작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부지역은 한번 볍씨를 뿌리고 수확할때는 벼의 밑둥을 베지않고
중간부근이나 윗쪽을 베는데 나중에 베어낸 자리에서 다시 싹이 터서
또다시 수확을 한다고 그런다
그래서 몇번째에 수확을 했느냐에 따라서 밥맛도 틀리다고 그런다
참고로 이곳 베트남의 쌀종류는 28가정도 되는데
우리나라의 쌀은 "아끼바리"종류라 찰기가 있어
급히 먹으면 체한다고 그런다
그러나 이곳 베트남 쌀은 찰기가 없어서 체하는 법이 없고
그냥 물에 말아서도 후루룩 먹을수가 있다
하노이에서 약 2시간을 달려 화빈에 도착한다
화빈에 도착하여 민속공연장과 함께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이곳은 점심 준비가 안된다고해서
길 건너편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으라고 그런다
그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좀더 이동하여 건너편의 식당으로 이동을 한다
나중에 점심을 먹고 다시 이곳으로 와서 민속공연늘 관람한다
암튼 이곳 버스는 광광회사가 운영을 하는데 약 300여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차장이 없는데 주차를 할때라든지
짐을 싫고 내릴때라든지 모든것을 차장이 차에서 내려 보조를 하고 있었다
즉 기사는 운전만 하고 고생은 차장이 다하는 것이다
왜그러냐고 했더니 차장 생활을 7년정도 해야
기사로 일할수가 있다고 그런다
물론 운전면허가 있어서 운전을 할수가 있지만 보조를 7년간해야
정식으로 운전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장은 7년동안 간이 의자를 앉아가며 힘들것도 참고
열심히 일을 하며 운전할 날만 기다린 것이다
민속공연장에서 멀리 산을 바라보니 동상이 보인다
호치민 주석의 동상인데 저 너머가 수력발전소가 있는 곳이다
점심 준비가 안되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면서 조금전에 다녀온 곳을 바라본다
도로에서 본 모습인데 왼쪽으로 올라가면 민속공연장이 있는 곳이다
점심을 먹을 식당에 도차가하며
민속공연장에서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식당인데 베트남 전통양식으로 지은 집이다
2층의 식당으로 올라가며
미리 준비되어 있는 베트남 음식
식당에서 준비한 베트남 음식
생선튀김과 닭고기 그리고 꼬치등 여러가지가 있으며
오이를 비롯하여 야채로 무친 반찬이 보인다
특이한 향신료가 있어서 좀 느끼한 편이지만 이정도는 아무렇지않게 나는
잘 먹었다
그러나 마눌을 비롯하여 다른 몇분들은 느끼하다며 잘 못먹는
분도 있었다
암튼 양은 푸짐하게 주는것 같아서 좋았지만 아까운 음식을 남기고 와서 좀 그렇다
오늘 먹게되는 점심메뉴
좀 느끼하다며 입맛에 맞은것만 먹고있는 마눌
2층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있는 일행분들
밥먹다 말고 일어서서 몇장 담아본다
식당의 모습
점심을 먹으면서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소주도 곁들인다
암튼 끼니때마다 반주로 소주를 먹었는데 맛은 좋았다
소주맛은 우리것이라 변함이 없기에...
그리고 베트남 현지식당에도 우리나라의 소주가 있지만 수입산이라
가격이 비싼 편이다
우리나라의 식당에서는 3천원 그리고 비싼곳은 4천원을 받기도 하는데
베트남 식당에서는 우리 가격으로 약 8천원 정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양을 먹어야 되기에 술값이 만만치 않아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사가지고 간 것이다
물론 면세점에서 산 술은 비행기에 들고 탑승을 할수가 있다
점심을 먹고 아래로 내려와 식당 주변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은 2층 식당을 바라보며
제법 규모가 큰 식당의 모습
아래는비어있는 구조이다
그러나 이곳 식당은 크지만 화장실 규모가 작아서 많이 기다려야 된다
점심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며
식당의 모습
식당에서의 마눌
식당 한쪽에 달려있는 이상한 열매
무슨 열매인지 잘 몰라서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잭프푸트"라는 과일이었다
버스가 와서 다시 조금전에 들렀던 길 건너편의 공연장으로 이동을 한다
공연장에 도착하여 건물 뒷쪽에 있는 민속공연장으로 들어가며
건물 뒷쪽에 있는 민속공연장의 모습
민속공연을 보기위해 2층으로 올라가며
민속공연을 보기위해 앉아있는 일행분들
민속공연을 하기위해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민속공연중에 바나나로 만든 전통술을 시음하는 모습
대나무 빨대로 쭈욱 빨아서 마신다
공연팀이 우리더러 마셔보라고 하니 많은 분들이 어떤 맛인지 확인하기 위해 대나무 빨대를
이용하여 바나나 술을 마셔본다
나도 마셔보았는데 술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좀 도수가 있는 편이었다
커다란 통에 대나무를 꽂아서 술을 빨아 마신다
술을 마실때는 그냥 마시지 말고 마시기 전에 큰소리로 "허이 허이"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마시라고 그런다
바나나로 만든 베트남 민속마을의 전통술
그리고 여러가지 공연도 펼쳐진다
한쪽에서는 악기연주를 하고 연주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나뭇잎과 나무를 먹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가이드 분이 싫으면 먹지 마라고 그런다
별로 맛이 없고 매우 쓰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받아들고 먹지않고 그냥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암튼 별로 맛은 없고 엄청 쓰다고 그런다
이분은 민속팀의 리더인데 암튼 엄청 마셔대고 있다
그냥 액션만 취하는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마신 것인지는 잘 학인이 안된다
그냥 입만 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일행분들은 호기심으로 인해 쭈욱 빨아서 마셔본다
또다시 사랑을 구애하는 공연이 펼쳐지고
그리고 대나무를 이용한 놀이도 이어진다
익살스런 공연팀의 리더
어서 나와서 민속주를 마셔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우리일행분들의 사모님들이 나와서 술맛을 보기위해 열심히 빨아댄다
그런데 술을 못마신 울 마눌도 나와서 마셔본다
웬일이당가...
대나무를 이리저리 건너면서 노는 공연
열심히 맛을 보고 있는 일행분들
점심때 먹은 술이 아직도 얼큰한데 이곳에서 나도 몇번 빨아서 먹어보았더니 알딸딸하다
공연을 마치고 바라본 공연장
공연을 마치면 기념품을 구입을 하라고 하지만 가이드분이 별로 살것이 없다며
될수 있으면 사지 마라고 그런다
그래서 모두들 사지않고 그냥 내려온다
공연장에서 주차장으로 다시 내려오며
공연장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모습
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습
가운데 식당건물 뒷쪽에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의 주차장 아래쪽에 있는 베트남의 건물
폭이 좁고 뒷쪽으로는 넓은 편이고 또한 윗쪽도 몇층으로 되어있다
암튼 이곳 공연장에서 민속공연 괂람후에 버스에 탑승하여 약 20분 정도 더 들어가면
산악지역에 위치한 소수민족 마을에 도착을 하게된다
그리고 우리 일행의 대표로 선출된 반장님의 인사말씀이 이어진다
소수민족 마을에 도착하며
화빈에서 버스로 이동중에 가이드분의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아마 마을에 도착하면 아이들이 서로 자기집에 가자고 그럴 것이다
그런다고 무작정 따라가지 말고 정해진 곳으로 갈테니 그리 알아라고 하며
또한 아이들이 우리말로 좀 짠하다고 돈을 함부로 주지 마라고 그런다
특히 한국사람들이 지난날에 못살적을 생각하여 애들에게 돈을 잘 주는데
돈을 주다보면 이곳 사람들이 노력을 하지않고 또한 좋을것이 없다며
될수 있으면 돈을 주지 마라는 것이다
돈을 주다보면 아마도 이곳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 소수민족의 체험코스가 관광지에서
사라질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다
암튼 버스가 마을에 도착하자 가이드 분의 염려대로 마을 분들이 달려온다
처음에는 여자 학생들 몇명이 오더니 바로 얼마 안되어 마을에서 아주머니들이 우루르 몰려 나온다
서로 자기집에 가자면서 말이다
사실 가고자 하는 집이 두군데에 정해져 있어서 아무곳에나 가지는 못하지만
이곳의 아주머니들이 서로들 자기집에 가자고 야단들이니 입장이 곤란하다
암튼 마을에 버스가 도착하자 마을 아주머니들이 정말 맨발로 달려나올 정도로 많은 분들이 달려오는데
너무나 놀랬다
서로들 자기집에 가자면서 말이다
자기집에 가자는 이유는 집에 들러서 물건을 사주라는 것이다
그래야 돈을 벌기에...
그러나 대화가 잘 통하지 않기에 그냥 말없이 가이드만 따라간다
산골 마을에 관광객이 오니 서로들 자기집에 가자고 하면서 달려드니 이것참 입장도 난처하다
다만 개인적인 행동을 할수가 없기에 가이드분을 따라서 이동을 한다
암튼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니 순간 당황하였다
안쪽에 보이는 소수민족마을
그리고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고 하지만 이곳 베트남은 수많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그런다
하지만 대규모의 민족이 있고 이곳 산악지형을 비롯한 산골에 소수민족이 있는데 이곳도
소수민족중에 한곳인 곳이다
암튼 이곳은 하노이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2시간 20분 정도의 거리다
다음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베트남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여행사진(2일차)...하롱베이 유람선관광 - 1편 (0) | 2011.05.01 |
---|---|
베트남 여행사진(1일차)...소수민족 생활체험과 수력발전소 (0) | 2011.05.01 |
베트남 여행사진(1일차)...바딘광장과 호치민생가 (0) | 2011.05.01 |
베트남 여행 동영상- 2편 (0) | 2011.05.01 |
베트남 여행 동영상 - 1편 (0) | 201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