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의 역사는 아픔과 기쁨의 반복이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투쟁,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 의 독립을 위한 노력,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까지….말 그대로 전쟁과 독립의 역사를 반복해온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선사시대) 50만 년 전에 이간이 거주했던 흔적이 있으며 기원전 7000년경부터 원시 농업에 종사해 온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세기에 청동기 시대의 세련된 동선문화가 출현했다. 베트남의 원류를 중국 전국시대의 월나라 유민으로 보기도 하지만 동선 문화를 향유하던 락비엤 족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중국의 지배) 기원전 111년 중국 한나라의 침략을 받아 중국에 병합되면서 7군이 설치됐다. 그후 938년까지 기나긴 중국 지배가 이어진다. 603년에는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칭하며 안남도호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베트남 사람들의 저항은 계속되었는데. 특히 43년에 있었던 쯩Trung자매의 항쟁을 통해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도 했었다. 그나마 중남부 지역은 중국의 영향이 닿지 않아 2세기경부터 참파 왕조(참족으로 현재는 소수민족으로 일부만 남아있음)가 형성되었다. 한자, 유교, 불교는 이 시기에 전래되었다.
(독립왕조시대) 939년, 응오꾸엔 장군이 받당(Bach Dang강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응Ngo왕조를 수립하며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최초로 독립하게 된다. 뒤를 이어 965년에 딘Dinh 왕조가 성립됐으나 주군을 중국에 양도하고 속국임을 자처하였다. 딘 왕조 이후 등장한 레Le왕조 역시 오래 통치하지는 못했다. 리 타이 또는 리Ly 왕조(1009~1225년)를 세우며 불교 육성, 문묘 건립을 통한 유교 확대, 행정제도와 조세재도를 정비했다. 수도도 탕롱(현재의 하노이)으로 옮겨 중앙 집권 통제를 시작했다. 이후 국호를 다이비엣 Dai Viet(大越)으로 변경하고 주변의 송나라, 크메르, 참족과 견주며 독립국가를 유지해 나간다. 쩐(Tran)왕조(1225~1400)때에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을 물리쳤다.
(레 왕조) 잠시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호 왕조(1400~1428년)를 뒤로 하고 등장한 것이 레왕조(1427~1789년), 레 러이와 응웬 짜이는 10년이 넘도록 지속됐던 명나라와의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둔전제 실시, 법률정비, 국자감 설치등의 군사제도와 유교제도를 재정비했다. 남부의 참파왕국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조, 발굴해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 했다.
(응웬 왕조) 17세기, 레 왕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찐Trin가는 북부, 응웬 Nguyen가는 중남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각각 외부 세력과 힘을 합쳐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는데 찐가는 덴마크와 , 응웬가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다. 이런 혼란기에 농민들의 반란(떠이선 반란)이 일어나 기존 세력을 몰아내기도 하였다. 떠이선반란 말기에 응웬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응웬 푹안 왕자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제압, 1801년에 남북부 지역을 완전히 통폐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쟈롱황제로 칭하고 수도를 훼(Hue:중부지역)로 천도해 응웬 왕조(1802~1883년)를 성립한다.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나라인 비엣남 (Viet Nam 越南)을 국호로 정식 승인 받고 남부까지 통합한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를 열었다. 응웬 왕조는 프랑스의 힘을 얻어 시작했지만 민망 황제를 거치면서 유교를 더욱 강화하고 중화사상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외국인에게 이양된 상업권을 회수하고 외국인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박해는 티에우 찌 황제때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는 일로 발전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는 1874년에 군대를 보내 다낭을 비롯한 베트남 중남부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부 지역에 식민지인 “코친차이나”만들었으며 1883년에는 중부지역을 안남, 북부 지역을 통킹이라고 부르며 보호령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식민지배) 프랑스는 1883년 8월, 아르망 조약을 체결하며 베트남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식민지배 기간에 쌀과 고무등을 수탈했으며 철도 등의 제반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중국으로 부터의 천년가까운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은 프랑스 지배기간에도 완강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초창기 반식민지 운동은 유교를 배운 사대부와 근대적 사상을 교육받은 민족주의적 성향의 해외파들이 주도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사회주의 성향을 띤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1927년, 베트남은 중국 국민당을 모델로 한 베트남 국민당을 결성해 옌바이 봉기를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된 것은 1930년으로 이때, 베트남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인 호치민이 등장. 1941년 베트남 독립동맹을 결성한다.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을 받아 인도차이나에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호치민은 공산당 세력을 규합하여 베트남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설립한다. 그러나 베트남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 라오스 캄보디아등 주면국 모두 공산주의화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호치민의 독립선언은 인정되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포츠담 회담을 통해 베트남 북부는 중국, 남부는 영국군이 분할 통치할 것을 합의 하였다.
(남북 분단과 독립전쟁) 포츠담 회담 이후 북쪽은 합의 내용대로 중국군이 들어섰으며, 남부는 영국군이 들어섰다. 또한 이런 틈을 노려 프랑스도 종주권 회복에 노력하였다. 때마침 호치민은 북부에 진군한 중국군(국민당)을 우려해 프랑스에 북부 주둔을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1946년 11월, 하이퐁에서의 관세분쟁으로 인해 프랑스군이 공격을 가해옴으로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8년간의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호치민은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하였으며, 그 와중에 중국이 공산화되는 커다란 지형 변화를 겪에 된다. 중국의 모택동은 호치민을 지원하였고. 열세에 놓인 프랑스는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다. 아시아 국가의 공산화(도미노 이론)을 우려하던 미국은 프랑스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 결과 독립전쟁은 이념 전쟁으로 변질된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디엔 비엔 푸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패당하고 같은해 7월 20일 제네바 협정을 조인하며 끝을 맺는다. 제네바 협정은 2년후 자유 총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분할 통치되는 계기가 된다. 북쪽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정권,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응오 딘 지엠 정권이 들어선다.
(베트남 전쟁과 통일) 호치민의 승리를 확신한 남부 베트남이 예정된 총선거를 거부하고 지엠 정권의 연장을 승인하면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개적인 숙청 작업이 시작됐다. 남부에 있던 공산당 세력의 무력투쟁도 거세지고 무능력한 응오 딘 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쿠테타로 암살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호치민은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시도한다. 1964년 8월 통킹만에서 발생한 군사 충돌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다.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은 미군의 대규모 전투전과 기습 공격 및 지뢰 사용을 주무기로 하는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전은 전선도 없는, 잔인하고도 지루한 소모전으로 수년간 계속됐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68년 베트남의 설날에 게릴라들은 남부 베트남의 100여개 도시를 총공격해 사이공주재 미국 대사관마저 점령했는데, 이 장면이 TV에 보도되면서 미국 내에서 격렬한 반전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책임을 지고 그해 실시될 대통령 선게에 재출마를 포기했다. 차기 대통령 닉슨은 “ 미군 없이 남부 베트남 군인들에 의해 전쟁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발표하고, 이는 곧 “닉슨 독트린”으로 이어진다. 이후 베트남전의 기세는 점점 수그러들었고 닉슨 대통령도 2만 5천명의 미군 철수를 발표하면서 북부 베트남과 평화회담을 전개했다. 1970년 봄, 미국은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인접 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비밀리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밀 폭격으로 인해 100만명 가까운 캄보디아인이 사망하자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반전 데모가 일어난다. 여기에 베트남전의 전모가 담긴 미 국방성 비밀문서 유출사건이 터지면서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파리회담은 1973년 1월 휴전협정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해 베트남의 모든 미군이 철수하게 됐다. 휴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의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이 함락되면서 기나긴 베트남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북부 베트남군110만명, 남부베트남군 25만명, 베트남민간인 2백만명, 미군 5만7천명, 한국군 5천명, 호주군 42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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