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11년 5월 2일 월요일
- 산행코스 : 개암사-주류성 복신굴-원효굴-기도처-주류성-베틀굴-우금산-지능선-개암사
- 산행시간 : 천천히 약 1시간 45분(13:55~15:40)
- 누구와 : 늘산형님,종식형님,순조형님,그리고나
조금전에 내변산을 다녀오고서 이곳 우금산에 다시 오른다 개암사와 우금산에 와보기위해 조금은 코스를 단축시켰지만 그래도 내변산의 뜻깊은 코스로 다녀와서 지금도 행복하다 암튼 이곳 개암사와 우금은 예전에 눈이 많이 내린날에 올랐었지만 그때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제대로 확인을 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순조형님과 늘산형님도 개암사와 우금산에 가보고 싶다고 하여서 다시 오게 된 것이다
산행안내도
산행안내도
오늘은 평일이라 개암사 입구의 다리옆에 주차를 하고 편한 차림으로
개암사로 오른다
개암사로 들어가며
이곳 개암사 뒷편의 산이 우금산인데 개암사 입구의 현수막에는
능가산 개암사라고 적혀있다
능가산이란 이름이 무슨 뜻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불교용어인지...
개암사 입구에서 당겨본 울금바위
개암사 돌계단에서 오늘 함께한 형님들을 담아보며
개암사 대웅전과 울금바위
돌계단에서 바라본 개암사 입구의 모습
개암매(梅)와 대웅전
이곳 개암사의 개암매(梅)는 수령이 오래된것 같다
지금은 화려한 꽃을 떨구고 있는 모습이다
대웅전을 향해서
부처님 오신날이 며칠 남지 않아서인지 수많은 연등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보물로 지정된 개암사 대웅전
개암사 대웅전 안내문
두가지 꽃을 피우고 있는 복사꽃을 담아내시는 늘산형님
암튼 신기하다
한그루의 나무에서 두가지의 꽃을 피우고 있다니...
아마도 접목을 한것 같다
대웅전의 옆모습
개암사 우측으로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복신굴 입구에 도착하며
개암사에서 약 20여분 오르면 이곳 복신굴에 도착하게 된다
복신굴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서 왼쪽은 복신굴로 갈수가 있고
우측은 원료굴(방)으로 갈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복신굴을 보고나서 나중에 다니 이곳으로
내려와 우측의 원효굴로 가기로 한다
복신굴 윗쪽의 기암절벽의 모습
복신굴에 도착하며
*복신굴
복신굴은 주류성의 우금암에 있는 거대한 석굴이다.
이곳은 일명 복신굴로 부흥백제국의 군을 지휘하고 통제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福信の洞窟は、周留城の遇金岩がある大きな岩窟だ。
ここは百済軍を指揮統制した福信の洞窟として知られている。
초기 풍왕 정부의 중심에는 도침과 복신 장군이 있었다.
두 장군은 웅진강구와 두량윤성 전투 이후 갈등이 발생하여
복신이 도침을 제거 후 복신이 군사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전열이 분산되어 662년 7월 지라성전투에서 패전하였다.
풍왕은 장기간 일본체류로 국내 정치기반이 약하여 정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고,
성에서 주류성으로 환도한 후에는 국가제사 주례의식의 주관을 할뿐이었다.
복신이 권력을 독점하자, 풍왕과 복신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8(의자왕)의 기사에 “ 이때 복신이 이미 권세를 오르지 하면서
부여풍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굴속 방에 누워 풍왕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 하였다.
풍왕이 이를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천지 2년 6월에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하는 생각이 있음을 의심하고,
가죽으로 손바닥을 뚫어 묶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신에게 물어, ”복신의 죄는 이미 이렇다. 참할 것인가, 아니가“라고 말하였다.
그때 달솔 德執得이, ”반역의 사람을 방면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복신은 집득에게 침을 뱉고, ”썩은 개, 미친 놈“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역사를 준비하고, 참하여 머리를 젓을 담갔다’라는 기록이다.
복신의 죽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바로 복신이 병을 핑계로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주류성이라 주장하는 건지산성이나 학성 등에 복신굴이 있는가?
복신굴이 바로 주류성의 결정적 근거가 되는 것으로 굴이 없다면
주류성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자료발췌함)
복신굴의 모습
암튼 복신굴의 자세한 내력은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겠으나
자료를 보면 백제부흥기의 복신이란 인물이 이곳에서
숨어지냈다고 하여 복신굴이란 이름으로 불리운것 같다
하지만 이곳에 산성이 있는데 학자들이 이곳을 백제부흥기의 주류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데 정확하게 이곳이 주류성이라고는 단정할수가 없는것 같다
(지금도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 서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검색창에 복신굴과 주류성을 검색하면 다양한 자료들을 볼수가 있다
복신굴의 모습
설명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하고 의자왕과 왕자들과
지배 계급인 대신들 귀족들 수만명이 당나라로 포로로 이송된후,
복신과 도침이 중심이 되어 당시에 일본에 있던 풍왕자를 모셔와
일본서기에 써있듯 주류성에 근거해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 했다는 곳이
이곳 우금산성으로 여러 학자들이 비정하고 있다.
개암사 대웅전뒤로 멋진 울금바위가 보이는데, 그 바위절벽 아래에 굴이 있어
일명 복신굴이라 하고,
또한 불행이도 복신과 도침이 서로 의심하고 권력 쟁탈을 하다 드디어 복신이 도침을 죽이게 되고 ,
또한 풍왕자는 복신을 죽이게 되고, 드디어 일본에서 원정군으로 수만의 군사를 보내주어
마지막 대 반격전을 하지만 이곳 동진강 어귀에서 화공에 의해
백제 부흥의 마지막 희망인 왜의 수군도 전멸하니
애통하게도 한때 중국대륙 해안 지방까지도 지배했던
백가제해의 나라 즉 백제는 영영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이곳에 있던 풍왕자는 고구려로 망명하고,
당시 또 하나의 부흥전쟁의 중심지였던 임존성(지금의 예산 예당저수지 옆 봉수산)에서
절치부심하던 그 유명한 흑치상지 장군은 결국 백제의 재건을 포기하고 투항하니,
이 사람은 훗날 당나라에서 큰 공을 세우는 장군이 된다.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영토 확장 전쟁으로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곳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이게 되는데
어느 학자의 연구 논문에 의하면 결국 삼국통일의 원대한 계획에 의한 사업이 아니라,
김춘추와 그 아들 법민이 그 가족의 사적인 원수를 갚기 위해 벌린 전쟁으로
결국 백제는 망하고 의자왕은 법민에게 치욕을 당하고 당으로 끌려가게 된다.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 보면
백제의 많은 유민들이 왜군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그 이전부터 역사적 소용돌이가 있을때 마다 패자측 지배세력들은
일본으로 피신하게 되는 그 사실 때문에,
일본인들의 잠재의식속에는 반도인 우리나라에서 쫒겨난 세력인 자기들이고,
그래서 한반도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원수인 것이라 여긴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 일본인들에게 제일 싫은 민족이 누군가 물으면 한국인 이라고 했다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저들을 지배했기를 했나 우리가 36년을 지배 당했지..
임진왜란도 저들이 건너와서 괴롭혔든거고...
그렇게 유전적으로 한반도와 그 국민을 원망하는 세력들이 일본인 이라는데..
(자료발췌함)
복신굴에서 늘산형님
복신굴에서 원효굴을 향하면서 올려다본 모습
복신굴 입구의 우금산성 안내문에서 우측으로 돌면 원효굴이 나온다
얼른보면 원효굴이 윗쪽의 바위절벽에 있어서 잘 확인이 안된다
원효굴 아래의 바위에 새겨진 글자
원효굴을 향하며
바위 절벽에 약 25~30센티 정도 되는 좁은 공간을 지나야 원효굴로 갈수가 있다
좁은 공간을 조심스럽게 지나니 심장이 약한 분들은 쉽사리 지나기가 어려울것 같다
바로 아래는 절벽이라 상당히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원효굴로 향하면서
좁은 공간이다보니 위험스러워 작은 돌을 시멘트로 중간중간에 고정시킨 흔적이 보이고
약 10여미터 거리를 살짝 돌아서면 바로 앞에 원효굴이 나타난다
원효굴에 도착하며
좁은 길을 통과를 하니 바로앞에 신비스런 원효굴이 나온다
이곳 원효굴은 원효와 진표및 여러 고승들이 수행을 하신곳이라고 그런다
마치 의상봉 아래의 "불사의방" 처럼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공포감이 있는데
이런곳에서 제대로 수행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원효굴에서 지나온 곳을 바라보며
좁은 공간을 타고 넘어와야되니 공포감을 느끼신 분들은 쉽게 올수가 없는곳이다
원효굴에서 수행을 하신 늘산도사?님
수행을 하신 모습이 도사같기도 하다
원효굴에서 바라본 절벽
아래쪽에 원효굴로 올수있는 매우좁은 유일한 길이 보인다
원효굴에서 내려다본 모습
아래쪽에 종식형님이 보인다
원효굴을 나오면서 다시 바라본 원효굴
늘산형님과 나만 이곳 원효굴을 보고 나왔다
원효굴을 다시 나오며
좁은 공간이다보니 정말 짜릿한 기분이다
자칫 실수를 하면 정말 큰일이 발생을 한다
그러나 늘산형님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여유있는 모습이다
암튼 겁이 없으신 늘산형님
안전한 곳에 도착하여 원효굴 방향을 바라본다
암튼 암릉을 좋아하신 인간네비게이션 형님도 이곳 울금바위를 다녀가셨지만
아마도 이곳 원효굴은 못보신것 같다
혹시 이곳 원효굴을 못보셨으면 다시한번 오시고 싶으실텐데...
암튼 앞전에 다천형님께서 다녀오신 사진을 보고서 나도 언젠가 가보고
싶었는데 이곳 원효굴을 드디어 오늘 보게되서 뜻깊은것 같다
원효굴에서 다시 내려와 바위에 새겨진 각자를 바라본다
원효굴 아래의 기도처에 도착하며
원효굴은 무서워서 보질 않고 이곳 기도처에서 도를 닦고 있는 순조형님
엄청난 굵기의 담쟁이넝쿨 위로 왼쪽에 조금전에 다녀온 원효굴이 보인다
엄청난 굵기의 담쟁이넝쿨
우금산성에 도착하며
기도처에서 우측으로 조금 진행하면 우금산성이 나온다
이곳이 주류성이라고도 하는데 다른곳도 주류성이라고
주장한 곳이 있어 이곳이 주류성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주류성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제 왕족 복신(福神)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왜국에 가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추대하여 백제왕으로 삼고
각지의 호응을 얻어 세력을 확대해갔다.
이는 패망한 백제 왕실의 왕통을 다시 일으켜
백제 유민을 결집시키려는 의도였다.
한편 금강의 서부 내륙 지방에서도 임존성(任存城)을 중심으로
또 다른 부흥군이 활동하고 있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은 3만 명의 부흥군을 거느리고,
초기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한때 200여 성을 탈환하는 등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이들 주류성의 도침은 군대를 정돈하여 수도 사비성을 탈환하고자 공세를 펼쳤다.
신라에서 구원군이 오자 전세가 불리해진 복신의 군대는
임존성으로 후퇴하여 흑치상지의 군대와 합세하였다.
당시 백제 부흥군의 포위를 풀기 위해 신라와 당의 군대가 1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그 세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고구려의 공격에 나서게 되자,
다시 주류성으로 옮긴 복신 등 부흥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662년 5월에는 왜국에 머무르고 있던 부여풍이 왜의 원군을 거느리고
도착함으로써 부흥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부흥군 내부에 불화가 생겨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였고,
신라와 당의 연합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주류성이 점차 고립되어가는 가운데 다시 풍왕이 복신을 죽임으로써
부흥군은 더욱 세력을 잃고 말았다.
내분을 눈치챈 당의 연합군은 수륙 양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백강구(白江口) 전투에서 구원왔던 왜국의 수군이 크게 패배하자
백제 부흥군은 큰 타격을 받았다.
풍왕은 더이상 주류성을 지키지 못하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주류성 함락과 동시에 대부분의 성들은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임존성만이 외롭게 항전하였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663년 말에 함락되었다.
이로써 4년간에 걸친 백제의 부흥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주류성은 백제 멸망 이후 수도 사비성을 대신하여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할 만큼 그 이전부터 백제 지방 통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자료발췌함)
암튼 백제부흥기의 주류성이라고 추정된곳은 이곳 말고도 다른곳이 있는데
문헌에 나온 자료를 참고삼아 아직도 어떤곳이 주류성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지금도 논쟁중이라고 한다
산성에서 바라본 울금바위
바위의 규모가 정말 엄청나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울금바위
산성에서 조금 내려와 바라보니 조망이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
조망바위에서 조망을 즐기신 순조형님
좀더 당겨보며
역시 조망이 너무 좋다
멀리 개암지가 보인다
조망바위에서 당겨본 개암사
폼이 멋져요
늘산형님도 울금바위를 배경으로
이제 울금바위로 향한다
울금바위를 우측으로 우회를 하다가 협곡이 보이길래 오를수 있을것 같아서
혼자서 올라가보니 로프가 매달려 있는게 아닌가..
그래서 저곳의 로프를 잡고 힘겹게 오르니 난이도가 높은 절벽이 나오고야 말았다
로프가 있으면 쉽게 올라갈수도 있었으나 로프가 없어 위험할것 같아서
고민을 해본다
세분의 형님들은 다른곳으로 내려가 버린후라 나혼자만 오르기가 좀 그렇고 해서
아쉽지만 합류하기로 하고 내려선다
거의 다 올라와서 바라본 암봉의 모습
저곳이 울금바위 정상 주변의 모습인데 이곳까지 올라와서 막바지 구간을 올라가지 못해서
다시 내려가니 아쉽다
베틀굴의 모습
위험한 구간으로 오르지 못하고 베틀굴에 도착하여 세분의 형님들을 부르니
대답이 없다
어디로 가셨을까...
이리저리 다니면서 소리를 지르며 불러보았으나 도대체 대답이 없다
그래서 이분들이 그냥 내려가실 분들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울금바위 정상 부근으로 나도 오른다
울금바위 밑에 도착하니 어느새 세분의 형님들은 울금바위 정상에
오른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나도 울금바위로 오르기위해 올라가니 역시 이곳도 쉽게 오를수는
없는것 같다
울금바위를 오르면서 내려다본 모습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웬만한 곳은 갈수있는 분들이라 나도 울금바위를 향해 오른다
조금 경사가 심하지만 튀어나온 바위를 잡고 비교적 쉽게
울금바위로 오른다
울금바위에 올라 조금전에 산성에서 조망을 한 바위를 바라본다
울금바위 정상에 도착하며
그런데 위험한 곳에 두분의 형님들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암튼 못말리는 분들이시다
여기서 보기에도 아찔하다
두분을 당겨보며
그래서 나도 스릴을 느껴보고자 저곳으로 향한다
양쪽은 말그대로 절벽이라 오금이 저릴 정도이다
두분을 당겨보며
두분은 다시 돌아가고 나는 암봉 끝으로 이동을 한다
늘산형님 왼쪽의 나무가 있는 협곡 부근으로
조금전에 올라오려다가 포기를 한 곳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아도 경사가 상당히 심하다
이쪽의 상황을 몰라 포기를 했었다
다만 어떻게든 올라갈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내려가는데 애로사항이 있을것 같아서 더이상 오르지않은 것이다
짜릿한 암봉에서 바라본 의상봉과 쇠뿔바위봉
이곳에서 바라보니 절벽의 높이가 어마어마하다
지금은 바람이 불지 않으나 바람이 부는 날에는 이곳에 올수가 없을것 같다
조금전에 다녀온 암릉을 바라보며
스릴은 정말 짜릿한 곳이다
울금바위를 내려서며
내려가는 것도 결코 쉬운일은 아니나 올라올때보다 어렵지않게 내려설수가 있었다
어느새 건너편 암봉에 올라서신 종식형님
종식형님을 당겨보며
예전에는 겁이 많으신 종식형님이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심장이 튼튼하신 모습으로 변하였다
늘산형님도 어느새 암봉을 오르신 모습이 보인다
하여튼 늘산형님은 겁이 없으신 분이시다
옆에 튼튼한 로프가 있는데도 로프도 없는 위험한 곳을 자연스럽게 올라가신다
어느새 위험한 암벽을 타고 올라 가신다
늘산형님을 당겨보며
울금바위 하산길에 건너편 암봉에 계신 두분을 담아본다
당겨본 모습
하여튼 못말리는 분이시다
저곳에서도 벼랑끝에 서있는 모습이다
내려온 울금바위를 바라보며
경사가 상당히 심해서 초보자는 오르는데 상당히 위험할것 같다
울금바위를 내려와 또다른 암봉에 올라와서 바라본 모습
암봉에서 바라본 원효굴
아래쪽에 조금전에 다녀온 원효굴이 보인다
울금바위와 우측 아래쪽에 원효굴이 보인다
당겨본 원효굴
암봉에서 울금바위를 바라보며
울금바위 암봉 옆사면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
암봉을 내려와 베틀굴을 지나 능선 갈림길에 도착하여 우측의 능선을
따라 가기로 한다
능선에서 왼쪽은 다시 복신굴로 가지만 우리 일행은 다른 코스로 하산을
하기로 하여 우측의 능선을 따라간다
능선을 따라 조금 진행하니 선명한 길은 다시 우측으로 이어져 있어서
이곳으로 가면 좀 멀어질것 같아서 왼쪽의 길로 내려선다
왼쪽의 길로 내려서니 개암사 뒷편으로 내려서게 된다
하산길에 당겨본 울금바위
우측에 바위와 나무의 경계가 있는 곳이 원효굴이다
개암사 뒷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서며
이제 개암사가 가까이 보인다
개암사를 바라보며
이제 개암사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올랐으며 왼쪽으로 내려온 곳이다
암튼 오전에 내변산 산행을 하고 다시 이곳 개암사와 우금산에 다녀왔는데
너무 뜻깊은 산행이 되었다
비록 며칠전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후라 좀 피곤하였는데 아직 피로가 덜 풀려서인지
산행을 하는데 매우 피곤 하였었다
하지만 오늘 산행을 한 내변산과 우금산에 오랜만에 산행을 하게되니
어느덧 피로가 사라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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